[촌부의 단상]라면에 얽힌 추억
아내와 함께 즐겨보는 "자연인"이란 TV 프로그램에
자연산 송이버섯을 찢어서 넣고 라면을 끓여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는 순간 너무 맛이 있어 보여 군침이
돌았다. 깊은 산속의 오지에서 자연인과 함께 라면을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아~~~ 요즘은 어디에서도
라면을 먹을 수 있지만 깊은 산속 오지에서 먹는 라면
맛은 어떨까?"라고 중얼거렸더니, 아내가 "라면 먹고
싶은가봐? 여기도 산골인데 끓여줄테니 드실라우?"
"그럴까? 라면 정도는 내가 끓여도 되네. 이 사람아!"
"야식 만드는 것보다 쉬우니까 내가 끓여주지 뭐!"
"그럼 함께 내려가세나!ㅎㅎ 당신은 뭘 드실라가?"
"나는 엄마가 사주신 호빵이나 하나 뎁혀 먹을라요!"
아내와 주방으로 내려와 라면 끓일 물을 냄비에 올려
놓고 거실로 나와 TV를 켜는 사이 아내는 데크에서
얼려놓은 동치미 국물을 퍼오더니 현관 창고에 나가
동치미 무우 한 조각을 꺼내와 썰었다. 얼마전에 담근
동치미가 아주 적당히 잘 익었고 국물도 아주 맛있게
잘 우러났다며 라면을 먹으며 맛이나 보라고 하였다.
아주 가끔씩 라면을 먹을 때는 묵은지나 푹 삭힌 고들
빼기 김치를 주로 먹는데 이번에는 우리밭에서 기른
덜 자라서 고갱이도 앉지않은 배추로 담근 겉절이를
내놓았다. 라면이 끓을 무렵 슬라이스 치즈를 한 장을
넣고 대파도 송송 썰어 얹고 고추가루를 솔솔 뿌려서
한 그릇 내놓았다. 그 사이 전자렌지에 호빵도 한 개
뎁혔다. 산골 부부의 초겨울날 야식이 준비된 것이다.
자주 먹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이렇게 라면을 먹는
것은 아내 고생도 안시켜 간편하고 그런대로 괜찮다.
소주도 한잔 곁들여 라면을 먹다보니 옛 생각이 났다.
촌부가 라면을 처음 먹은 것은 기억하건데 1966년
여름에 남해 촌놈이 서울에 왔을 때 작은 아버지께서
삼양라면을 끓여줘서 먹었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세상 태어나서 처음 라면이란 것을
먹어 보았다. 그러다가 1968년 서울로 유학을 와서
몇 번 먹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한동안 라면을 먹지
않았다. 아니 신물이 나고 진저리가 나서 먹을 수가
없었다. 라면에 대한 아픈 기억이 머리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 직전이었다. 그다지 잘했던 공부는 아니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는데 집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결국 그 꿈을 접고 상고를 택해 그 중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 방황을 했다.
입학식까지는 시간이 있어 고향집에 조부모님을 뵈러
갔는데 할아버지께서 기뻐하셨고 합격을 축하한다고
하시며 약간의 용돈을 주셨는데 그 길로 그 돈을 밑천
삼아 가출을 결심했다. 재수하여 인문계 학교 진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막상 가출을 결심 하긴 했으나
마땅히 갈 곳도, 어떻게 지낼 것이라는 대책도 없었다.
신문배달하며 나름 모아둔 돈과 할아버지께서 주셨던
용돈이 전부였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며 밤차를 타고
올라와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신문배달을 할 때 만난
친구가 혼자 사는 금호동 판자촌으로 갔다. 그날부터
끼니는 둘이서 라면 한 봉지에 물을 듬뿍 넣고 끓여서
찬밥을 말아 먹는 것이었다. 반찬은 김치와 단무지를
번갈아 먹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생활을 3주 가까이
하다가 고아였던 그 친구가 혼자 살기도 너무 벅찬데
가출한 친구까지 함께 지냈으니 오죽 답답하였을까?
결국 그 친구가 우리집에 연락하여 입학식 몇 일 전
어머님이 찾아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가출 생활이
끝났다. 그 당시 허구한 날 라면으로 끼니를 떼워서
그랬는지 그 이후로 한동안 라면을 먹지 않았다. 훗날
고마웠던 그 친구를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봤으나 찾지를 못했다. 고맙고 미안했던 친구인데...
다시 라면을 먹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일하며 가끔씩 다녔던 양평동에 있는
'러비집'이란 곳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재개 되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조금 많았던 총각이 운영을 했던 그
라면집은 늘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을 틀어놓곤
했었다. 아내와 사귀기 시작한 무렵이라 라면에 대한
아픈 기억, 상처도 사라지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은 마트에 가면 다양한 종류의 라면이 즐비하다.
입맛에 따라서 골라먹는 라면, 그렇지만 라면을 자주
먹지는 않는 촌부이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라면을 먹다보면 한동안 트라우마 처럼 따라 다니던
그 옛날 아픈 기억, 그 추억이 떠오르며 울적하여 혼자
남몰래 마음을 달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