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부의 단상]가족모임과 촌부의 지게질
11월 8일, 음력 시월 열이튿날, 입동(立冬)
어제는 하나밖에 없던 처남이 지난 9월, 58세 일기로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우리들 곁을 홀연히 떠나버린
바로 그날로 부터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불교에서는
이날을 49재(四十九齋)라 하여 불교식 제사 의례를
지내게 된다. 촌부가 알기로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육도(六道), 즉 천상(天上)·인간(人間)·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아귀(餓鬼)·지옥도(地獄道)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고인이 된 가족이 이 중에
이른바 삼악도(三惡道; 지옥도·아귀도·축생도)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정성을 다해
빌면서 기도하는 의식을 49재(四十九齋)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절에서 종교의식으로 지내지 않았다.
다만 가족들이 모여 49재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들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수목장으로 조성해놓은 처남
묘소에 간소하지만 정성스럽게 마련한 제사상을 차려
놓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어떤 절차라던지 형식보다
남은 가족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정성스런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고, 또 생전에 고인이 번거로운
형식을 원하지 않았었기에 이러한 추모의식을 가졌다.
추모의식을 가지고 인근 '한상 차림'이라는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이번 식사는 둘째네가 부담을
하였고, 식사후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꽤 오랜 시간
이야기꽃을 피웠다. 차는 교사인 조카 딸내미가 선뜻
사겠다고 하여 녀석이 벌써 이렇게 성장했구나 싶어
흐믓하였다. 우리가 농사를 지은 알배추, 무우, 대파,
고춧가루를 고루 나눠주었다. 막내네는 맛있는 사과
한 박스를 자동차에 실어주었다. 처남의 추모를 겸해
가족모임을 가졌고 다음달 송년모임을 갖기로 하고
헤어져 각자의 삶터로 항했다.
오는 길, 원주의 대형 마트에 들려오기로 했던 당초의
일정은 갑작스런 사정으로 다음 기회로 미루고 곧장
산골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작업복을 갈아입고
지게를 챙겼다. 앞뜨락에 잔뜩 쌓아놓은 마른 꽃대를
지게에 싣고 퇴비장으로 옮겼다. 참 오랜만에 지게를
지는 일을 해본다. 지난해 이맘때 져보고 처음 아닌가
싶다. 앞뜨락과 장모님댁 뒷켠 마른 꽃대를 퇴비장에
서너 짐을 나르고 큰 밭으로 가는데 아내가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바베큐장에서 처남의 유품을 태우면서
아우와의 마지막 이별을 하며 우는 소리였던 것이다.
49일째 되는 날 고인의 유품을 태우는 것으로 탈상을
하게 된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일을 하다말고
아내에게 다가가서 "좋은 곳에서 영면할 수 있게 이제
놓아주자. 착한 사람이었으니 좋은 곳으로 갔을거야!"
라고 하며 아내의 어깨를 다둑여 주었다.
다시 큰 밭으로 올라와 엊그제 아내가 뽑아놓은 들깨,
아욱 마른 꽃대 그리고 고춧대를 지게에 지고 날랐다.
고춧대에는 미처 다 따지못한 붉게 익은 고추가 아주
많이 주렁주렁이고 풋고추도 아주 많이 달려 있었다.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고추는 된서리를 맞게 되면
못쓰게 되는 것이라서 텃밭농사이긴 하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아까운 마음이었고 못내 아쉬웠다.
지금에 와서 후회를 한들 무엇하겠는가? 퇴비장으로
보내 거름으로 만드는 수밖에... 고춧대는 아직 잎도,
줄기도 마르기 전이고 고추가 달려있어 여느 꽃대와
달리 꽤나 무거웠다. 아내는 제발 많이 지고 다니지를
말고 조금씩만 지고 다니라면서 성화를 했다. 그렇게
촌부가 고춧대를 지게에 지고 퇴비장으로 나르고 있는
사이 아내는 밭가에 뽑아놓은 지지대를 바베큐장으로
나르는 일을 했다. 이제 밭에는 농작물의 흔적은 없다.
모두 퇴비장으로 보내 잘 썩힌 다음 거름이 되어 다시
이 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일을 모두 마치고 보니
어느새 해는 서산으로 지고 꽤 볼록하게 차오른 시월
열하룻날 달이 산골 부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수고했노라!"며 방끗 웃는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