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부의 단상]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거야?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면서 산골 부부는 시간에 쫓겨,
세월에 쫓겨, 계절에 쫓겨 엄청 바쁘게 지내는 요즘의
일상이다. 촌부야 바깥에서 열심히 걷어다 나르지만
그 뒷마무리, 갈무리는 아내가 해야 하다보니 어쩌면
촌부보다도 아내가 더 힘들고 바쁜 것이 아닌가 싶다.
음력 구월 열여샛날 휘영청 밝은 달이 마치 대낮같이
창문 밖을 밝히고 있었다. 창가의 화분에는 10년 전
보성 녹차밭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조카 딸내미가
선물한 녹차나무에 차꽃이 피었다. 노란 꽃수술, 하얀
꽃잎에서 뿜어내는 꽃내음이 향기롭다. 너무 예쁘고
단아한 모습으로 핀 차꽃이 창문 밖의 달님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촌부가 넋 놓고
달구경, 꽃구경을 하고 있는 그때 주방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서 엊그제 캐다놓은 도라지 껍질을 벗기고
있던 아내가 하는 말,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거야?"라고 했다. 순간 아내는 도라지 껍질 벗기느라
끈적이는 진액을 손에 묻혀가며 고생 하는데 촌부는
달구경, 꽃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니 그 말에 지레 겁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무안한 생각이 들어서 "내가 좀
도와줄까?" 라고 했더니 "됐슈! 오늘은 그만 할라요."
라며 하던 일을 마쳤다. 뭔가 모르지만 마음이 짠했다.
다음날인 어제 아침, 아내가 "오늘은 젓갈을 달이려고
하는데 젓갈통을 바베큐장으로 좀 옮겨주실라우?"
라고 하여 "혼자 할 수 있나? 힘들텐데..."라고 걱정을
하며 두 통을 옮겨주고 일을 하러 나갔다. 젓갈 달이는
것은 아내가 어머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꽤나
오래전부터 아내는 갈치젓갈과 멸치액젓을 구입하여
큰 솥에 넣고 한참 달이고 체에 창호지를 바쳐서 맑은
액젓으로 내리는 힘든 과정의 일을 지금껏 하고 있다.
그냥 시중에서 파는 액젓을 사먹어도 되지만 아내는
어머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그 방법을 고집하고 있다.
불에 달이는 시간도 그렇지만 달인 후 창호지를 통해
맑은 액젓으로 내리는 시간은 정말로 인내가 필요한
지루한 일이다. 오전에 시작한 그 작업이 저녁무렵에
끝났으니 힘든 일이기는 하다. 커다란 젓갈 한 통을
달여 내린 액젓 양은 얼마 안된다. 달인 젓갈을 체로
내려 건데기 제거하고 난 다음 다시 창호지를 통해서
내린 것이라서 그렇겠지? 이 액젓은 김장은 물론이고
김치 담글 때는 꼭 넣는 양념이다. 달일 때 나는 냄새
때문에 젓갈을 달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외딴 산골집에서는 이웃 눈치를 본다던지 하는 등의
문제가 없으니까 좋기는 하다. 아내가 하는 힘든 일이
또 하나 끝났다. 일을 마친 아내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에고~ 힘들다. 그래도 개운하고 뿌듯하구랴!ㅎㅎ"
고생했다며 아내의 어깨를 토닥거려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발효 양념 만드는 일이
과연 우리들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가 있을까?"
오늘 오후부터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추위를 부르는
비가 내린다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요즘에
내리는 비는 추위를 재촉할 뿐이고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님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안되고 귀찮은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장기 예보에는 연이어 모레와 다음주
월요일에도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하며 기온도 영하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두 종류의 콩수확과
다음달 초순의 입동 무렵에 김장하는 일이 남아있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나면 아내 말처럼 바쁘게 사는
일은 이제 거의 없을 듯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