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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기회

[반상(盤上)의 향기] 형상의 놀이 vs 숫자와 은유 … 바둑과 주역은 길이 다르다

② 바둑과 주역

문용직 | 제364호 | 20140302
3 방정명문(方鼎銘文) [자료 문용직]
동양 문화의 고전 ?삼국지연의?를 보면, 주역의 대가 관로(管輅)가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잠깐 등장한다. 그가 길을 가다가 어느 소년의 상을 보았는데, 곧 명을 달리할 것으로 읽었다. 그래 일러주기를 “맑은 술 한 병과 사슴 육포를 마련하라. 내일 모시에 남산 소나무 아래로 가라.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을 것이라. 한 사람은 아름답고 한 사람은 심히 추할 것인데, 그 옆에서 술과 안주를 권하라. 다 마시거든 울고불고 하라.” 그래 다음날, 두 사람은 놀라면서 “인간의 술을 얻어먹었으니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수명 19(十九) 앞에 9(九) 한 자를 더해 주마.” 곧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이야기.

바둑과 주역은 동양 문화권의 중요한 상징이자 모티브였다. 그것은 기(技)를 오랜 기간 연마하면 도(道)에 이른다는 ?장자? 포정(?丁)편의 이해와 통하는 것으로, 동양 정신의 근간을 내면에 형성시켜주는 상징적인 텍스트였다. 그러기에 바둑이 깊은 철리(哲理)가 담겨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주역과 관계가 깊다고 긍정하는 것은, 바둑의 기원(起源)을 찾고자 할 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둑엔 주역이 없고 주역엔 바둑이 없다. 바둑에 음양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도 하고, 사시(四時)를 본받은 것이 바둑이라고도 하며, 천문(天文)이 반영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 또한 호사가의 흥미일 뿐이다.

과연 그런가. 증명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바둑에 주역 있고, 주역 속에 바둑이 있다고 주장하곤 하는데, 과연 이 글이 장담할 수 있는가. 증거 없이 주장만 한다면, 그야말로 우스운 꼴이 되리. 그러나 걱정 마시라. 매우 간단하다. 가벼운 고찰로 그 점을 증명할 수 있다.

오늘 짧은 이 글에서 제시하는 증거는 형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형상은 주역의 경우 상(象)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 <그림1>은 이괘(?卦)를 제시한 것인데, 저 그림으로서 주역의 64개 괘 중에서 27번째인 이괘를 표시한다. “턱 이(?)”로 새기고 있듯이 점사의 뜻은 먹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림2>도 보자. 21번째 서합(??)괘를 나타낸 것인데, 서합괘는 씹는 것과 관련이 깊다. 그런데 저런 그림에 대해 지난 2000년간 큰 오해가 있었다. 일례로 주역을 설명하는 두 바퀴의 하나인 상수학(象數學)의 유명한 설명 하나는 다음과 같다. 이괘는 인간의 얼굴, 그중에서도 입을 닮았다. 아래 위 양(陽) 표시는 입술. 그러니 입을 벌린 상태다. 서합괘는 씹는다는 뜻을 가진 것인데, 그래서 이리 해석한다. 입 가운데 씹을 것이 하나 들어 있다. 그래서 저 그림에서 서합괘를 얻을 수 있다. 참으로 그럴듯하고 명료한 설명이다. 그렇지만 과연 맞는 얘기일까?

<그림3>은 20세기 초 발굴된 은허(殷墟) 출토 청동기 방정명문(方鼎銘文)이다. 이 명문은 고고학계의 유명한 의문 중 하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명확한 해석이 얻어졌다. 초점은 왼쪽 끝에 그려진 기호와 오른쪽 조잡한 부호로, 이것이 숫자를 쓴 것임은 이제 분명해졌다. 이것은 주역을 만들 당시의 괘상으로, 숫자괘라고 불리는 이것이 변천하여 오늘 우리가 보는 저 그림1과 2로 변했다.

본래 주역의 괘상-음과 양 표시로 이뤄진-은 1부터 9까지의 숫자로 이뤄져 있는 것인데,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짝수는 6(), 홀수는 1(一)로 변했고, 또 그것이 오늘날 음(━ ━)과 양(━)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주(周)나라 출토 유물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자리 잡았다. 참고로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표시했던 고대 갑골문을 살펴두자.<그림4>

자, 여기서. 이괘와 서합괘를 이렇게 표시해보자. 점을 쳐서 숫자를 구하는데 주역 계사전에서 밝힌 바를 따랐을 때 그것이 788681의 순서로 나왔다고 하자. 이는 곧 이괘를 말한다. 그것을 갑골문으로 이뤄진 숫자 괘로 표시해보자. 그럴 경우 숫자괘는 <그림5>의 맨 위 사각형 표시부분과 같은 형상을 보인다.

여기서 입을 연상시키는 그런 상(象), 즉 <그림1>을 찾을 수 있는가? 찾을 수가 없다. 이는 저 유명한 1972년 마왕퇴 출토 백서(帛書)주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다. 그 자리엔 고대 한자 (6)이 오늘의 음 부호(━ ━)를 대신하고 있다. 음양 이전엔 숫자인 을 써서 음을 대신했고, 一은 양을 대신한 것이다. 그러니 음양이란 개념도 주나라 때엔 없었으며, 음양 이전엔 강유(剛柔)를 썼었다.

서죽(筮竹)이라든가 동전 등 주역에서 점을 칠 때 쓰이는 여러 방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로 귀착된다. 숫자를 얻어 그 숫자가 지시하는 바 역경내 점사를 확정하는 것이다. 그렇다. 주역의 초점은 숫자와 은유로 이뤄진 역경의 점사(占辭)인 바. 이로 볼 때 주역에는 형상이나 그림이 개재될 여지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기보1. 바둑이 상(象)을 이루어가는 과정
이제 바둑으로 고개를 돌려 보자. 바둑은 형상의 놀이. 반상은 물처럼 흐르고 나무처럼 자라나는 세상. 우리가 한 점 한 점 착점을 하면, 그 돌은 뭉치고 흩어지면서 의미 있는 형상을 이루어간다. 흔히 하는 주역의 논리를 따르면 소위 상(象)을 이루는 것이다. <기보1>은 지난 2월 23일 두어진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의 10번기 제2국에서 나온 것인데, 수순을 잠깐 쫓아가면 좌변 백과 흑이 나무처럼 자라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느낄 수가 있다.

기보2. 상이 급소를 자극한다
<기보2>를 보자. 유명한 바둑 격언인 “석 점의 중앙이 급소”라는 것으로 좌측 흑은 그 기본 형태. 우측 흑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백1 급소를 맞는 순간 흑의 몸짓이 크게 휘청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변 흑1을 둔다면 흑이 매우 안정적인 것도 알겠다. 그렇다. 바둑의 흑백 돌은 우리 몸의 은유로서 반상에 자신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기에 저 순간 대국자의 몸은 잠재 의식적으로 반응한다. 몸속 신경이 휘청거린다.

반상은 상하좌우 네 방향으로 이뤄진 세계. 우리 신체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하늘 향해 뛰어오르고 땅에 기대어 안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반상은 언뜻 보아 정적(靜的)인 세상인 듯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동적(動的)인 세상이다.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다. 생생한 긴장으로 당신의 몸과 정신을 활성화시키는 세계다. 두 점 머리 맞으면 당신의 머리가 아프다. 단수할 때는 당신의 다그침을 상대에게 각인시킨다. 예전에 기원에서 “아다리!” 하면서 힘껏 반상을 두들기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상은 삶과 죽음이 출몰하는 험한 세계. 상대를 가두는 장문은 올가미를 씌워 가두는 것이고, 멀리서 상대를 에워싸는 수법은 물고기 잡는 통발을 연상시키는 조(?)라고 불렀다. 형상이 주는 이미지와 실제 수법의 효과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반상은 수렵시대의 활동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친 세계다.

수렵하던 시대는 인류의 험난한 시대. 그러기에 우린 바둑을 두면서 내면에 불안을 느끼곤 한다. 초반엔 평온했던 마음이, 중반 돌과 돌이 부딪힐 때엔 불안과 긴장을 얻어 혈액이 뛰놀게 되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거리의 개념. 엘리베이터를 탈 때 우린 어떻게 자리를 잡아 서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과 거리를 두지 않던가. 적절한 거리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린 불안해하는 것이다. 바둑돌은 너와 나의 다른 모습. 돌과 돌이 얽혀들면 우린 주의를 세워야만 한다.

바둑과 주역. 즐겁고도 난해한 세상. 수천 년을 살아남은 놀이이자 철학적 즐거움을 주는 세계. 그러나 바둑은 물론이고 주역에 대해서도 온갖 오해가 덧칠되어 온 것이 현실. 때로는 그런 안개가 신비로움을 주긴 하지만, 그러나 신비는 없는 것이다. 신비로운 현상은 있어도 신비는 없는 것이다.

주역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계사전만 보더라도 모순되는 논리는 그 얼마나 중첩되어 있는가. 상과 관련해서 유명한 두 개의 이론을 보자. 태극에서 양의(兩儀)가 나오고 양의로부터 4상, 그에서 8상이 나왔다는 태극기원설. 그 못지않게 유명한 이론은 8괘에 대한 성인의 창조설. 성인이 천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8상을 보고 8괘를 만들었다는 것. 계사전에 실려 있기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이들 두 이론은 과연 서로가 상대를 용납할 수 있는가.

역사를 견뎌온 세계는 언제나 신화로 채색이 된다.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신화적 가미(加味). 베일을 걷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게 된다. 오늘은 주역의 오해를 하나 걷어냈지만 그 결과 바둑에 대한 암시적인 기대도 걷어낸 것은 참으로 아픈 일.



문용직 정치학 박사,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수법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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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웅 2014.03.02 22:44

    이런류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도 참으로 어려운 글입니다. (와룡은 이해하는지?)

     

    주역의 64괘는 음양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숫자와 은유(점치는 도구)일뿐이다. 그모양으로 이러니 저러니하는것은 본질이 호도된것이다?  간혹 바둑에 동양철학이 깃들어 있고 우주만물의 원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안타깝게도)바둑은 형상의 놀이일뿐이다?  필자(문박사)도 그렇게믿고 논거를 찾아 헤맸지만 그런것은 없더라. 다만  대국에 몰입하면 현실에서 생생하게 느낄뿐 신비는 없다고 결론 냈네요.

    말미의 태극기원설과 창조설(부정하면서도)을 언급한것에서 필자의 고뇌와 진지함이 느껴집니다.

     

  • ?
    와룡선생 2014.03.03 18:32

    나도 이해 못한답니다...^^

    수천년전의 주역이 현대에 맞는다는것은 이치에 안 맞지요...^^

    이론은 이론논리로 끝나야지...실제로 응용은 어려운것같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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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희짱 2014.03.03 00:30

    너무어려워ㅣ

    나가튼범부

    어려워

    나일주일휴가

  • ?
    와룡선생 2014.03.03 18:34

    요즘은 수희가  제일 잘나가는것 같아~~!

    그리고 항상 고맙소이다...ㅎㅎ

  • ?
    솔향기 2014.03.03 20:23

    ?臥龍, 안녕하신가.

    굳이, 수희가 얘기하지 않아도 너무 어렵네.

    우리같은 짱돌한테 물 부은다고

    세멘트 되겠는가? 무리야 무리.

    한마디로 Capacity over일세. ^0^

     

  • ?
    와룡선생 2014.03.07 17:24

    아이고 ~~!석학인 김영택이가 모르면 누가 아는감??

    항상 고마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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