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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의 단상

[촌부의 단상]

모진 한파가 몰려오면...


2020년 12월 17일 

음력 庚子年 동짓달 초사흗날


오늘 이른 아침 기온 영하 24도,

산골의 매서운 맹추위는 위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한파경보가 내려진지 나흘째, 혹한의 기세는 꺽일

기미가 안보인다. 이른 아침으로는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한낮에도 영하 10도에 머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워낙 오랜 세월 추위에 단련되어

견딜만 하다. 하긴 예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겨울날

평균 기온이었으니까 그땐 '정말 무슨 이런 추위가

있느냐?'며 힘들어 했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이나 여건에 적응을 하게 되는 인체구조, 대처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온대지방이라 할 수 있는 남쪽바다 섬에서 태어나

열두 살 나이에 서울로 유학을 갔었던 그해 겨울,

서울의 겨울 추위는 보리문디 촌놈에게는 너무나

가혹할 정도로 추웠다. 첫해 겨울이라서 옷차림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더 추위에 벌벌 떨었던 것

같다. 오죽했으면 학교에 다녀와 "아부지! 서울에

몬살거 같십니다. 그마 할무이와 할부이 계시는

남해 가모 안되겠십니까?"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컨데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으면 아마 빗자루

뭉둥이로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예전 우리네 자랄

땐 빗자루 뭉둥이, 회초리는 예사롭지않게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중, 고교, 군복무 시절엔

대걸레 자루는 물론 일본식 발음인 것 같은데 전용

빳다까지 체벌 도구는 참으로 다양했다. 


아이고~ 빗자루 몽둥이 때문에 이야기가 샛길로

새버렸네. 다시 원위치로...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그래서 애로사항이 있으면

아버지께 말씀드리곤 했었다. 대부분은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우리는 달랐다.

어머니 훈육은 대단하셨다. 처음에 좋게 타이르다

도가 지나쳤다 싶으면 영락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가 없으면 빗자루 몽둥이까지 동원되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린 것이다. 아버지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하셨다. "마니 추벘나? 알았다!"

다음날 학교에 다녀왔더니 아버지께서 평화시장에

다녀오셨다며 두툼한 외투, 털스웨트, 내복을 꺼내

주시며 입으라고 하셨다.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땐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해라서 막내를 제외한

우리 4남매는 난생 처음 입어보는 두툼하고 좋은

옷을 입는 행운을 얻은 듯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참으로 오래된 추운 겨울날에 대한 추억이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 그러니까 19년전 이야기다.

우리가 이곳에 삶터를 정하고 내려온 이듬해 겨울,

부모님께서 산골집에 다니러 오셨는데 그날 따라

유난히 추웠다. 인근 장평시외버스 터미널에 차를

몰고나가 모시고 오는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큰아야! 오지게 춥다. 이리 추번데 뭐할꼬 왔노?"

"살다보모 괜찮십니다. 어무이, 아부이 모실랐꼬

방도 하나 더 만들어 놨십니다. 가서보모 압니다."

"아이고~ 치아라! 내사 이리 추번디서는 몬산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서도 한 말씀 하셨다.

"내도 싫다. 우리 안오끼다. 너그끼리 잘 살모 된다."

라고 하셨다. 


그러셨던 부모님은 생전에 이따금씩 다녀가시기는

하셨지만 결국 이곳에서 모시지 못하고 서울에서

사시다가 아버지는 12년전에, 어머니는 3년전에

작고하셨다. 요즘도 한파가 닥쳐 추운 날이 오면

두 분의 생각이 나곤 한다. 마치 두 분께서 생전에

추운 겨울날 안부 전화를 드리면 늘 하셨던 것처럼

큰아들 부부를 걱정하셨던 말씀이 들리는 것 같다.

"엄청시리 추번데 따시게 하고 사나? 너무 추번데

산께 늘 걱정이라 그마! 뭐한다꼬 그 추번디 가서

고생을 하는지 모리겄다. 몸이 따시야 된깨 함부래

춥게 살지 마래이. 건강한기 제일인기라. 알았제?"20201217_06484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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