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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의 단상

​[촌부의 단상]

이래저래 기분이 좋은 날


10월 14일 음력 庚子年 팔월 스무여드렛날

어제 아침나절 아내를 데리고 보건지소에 다녀왔다.

전날 끝물 고추를 따면서 벌레의 습격으로 인해 눈이

감길 정도로 부어올라 느닷없는 고생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건지소장의 말에 의하면 이 시기에 종종

이런 경우가 생긴다며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주사를

한 방 놓고 바르는 연고에 먹는 약까지 챙겨주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오면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나, 이제 올핸 밭에 안들어 갈거야! 알았지?"라고...

그 상황에 촌부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래, 알았어! 지금부터는 내가 다 할게!"라고 했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전날 벌레에 물려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보건지소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선별작업을 하여 택배 보낼 준비를 하자며 먼저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고추에 섞인 고춧잎,

가지와 상한 고추를 일일이 골라내고 촌부는 박스를

가져다 담는 작업을 했다. 음식점을 하는 집은 조금

많이 담고 나머지는 대충 식구들 수에 따라 배분했다.

그렇게 12군데의 크고 작은 박스에 잘 나눠 정성껏

담았다. 그리고나서 주소 확인을 하고 포스트잇에다

하나하나 적어서 박스에 하나씩 붙였다. 농약을 전혀

쓰지않은 우리 나름의 농사방법으로 기른 고추라서

많은 이들과 나눔을 하지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하신 분들, 드리고 싶었던

분들 12집을 골라 보내드렸다. 끝물 고추라고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익힐 시간이 없어 익히지를

못한 것이라 시중에서 파는 고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무농약으로 기른 것이라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니

안심하고 드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여간 뿌듯하다.


읍내에서 택배를 보내고 기왕 내친김에 오대산으로

단풍구경이나 하고 오자고 했더니 아내는 눈 때문에

꺼려했다. 다행히 집에서 나오면서 선글라스를 하고

나와 남들 시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가기로

하여 국도로 차를 몰았다. 점심때가 다되어서 월정사

못미쳐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시켜 점심을 떼웠다.

이따금씩 다니던 집인데 맛도 반찬도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아내도 촌부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마도

다시 가지는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좀 잘하지...

월정사 매표소앞에 자동차들이 줄을 서있다. 평일에

무슨 일인가? 엇그제 뉴스에 오대산 단풍에 대하여

나오더니 그 소식에 단풍관광을 온 사람들인가 싶다.

우리는 신도증이 있으니 언제라도 보여주면 입장을

하게 되어 이럴땐 참 편리하고 우대를 받는 느낌이다.


월정사를 거쳐 상원사까지는 약 9km 남짓한 비포장

도로이다. 우리 부부는 이 산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철마다 몇 번씩 드라이브 삼아 찾곤 한다. 지난해에는

집안에 여러가지 좋잖은 일들이 있어 자주 못갔었다.

월정사를 지나 비포장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앞쪽에

살수차가 길바닥에 물을 뿌리며 서행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가며 주변 풍광을 즐길 수가 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면서 아내는 앞서가는 살수차 사진을 남겼다.

상원사 주변은 그야말로 단풍으로 물들어 장관이다.

울긋불긋, 형형색색, 만산만홍 더 이상 뭐라고 표현

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하고 반야심경을 암송하고 나와 상원사에 가면

들리는 찻집에서 대추차와 팥죽을 시켜 먹으며 주변

풍광을 실컷 즐겼다. 아내와 함께하는 이런 시간이

너무 뜻깊고 즐겁고 신나고 좋다. 우리집에서도 보게

되는 단풍이지만 오대산 단풍은 더 좋게 보이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 복에 겨운 생각이라고 해야할까?


흔히들 가을을 이렇게 말한다. 

일엽지추(一葉知秋)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고...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 것을 바라보며 가을이 왔음을

알고, 나뭇잎 하나하나가 형형색색 물들어 온 산으로

퍼지고 퍼지면 만산만홍, 만산홍엽을 이룬다고 한다.

봄날에 꽃은 하루에 20여km 북상하듯이 가을날엔

단풍이 그와 비슷한 속도로 남하를 한다고 들었다.

꽃이 피면서 북상하는 속도, 단풍이 물들어 남하하는

이 속도는 우리네 인간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평균

걸음 속도와 비슷한 것이다. 이 속도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자연이 정한 자연의 속도라서 그런 것이겠지?

하여간 만산홍엽은 눈에 담았고 어지러운 마음들은

상원사 부처님께 내려놓고 와서 마음이 가볍다.


일에 파묻혀 지내다가 모처럼 눈요기도 하고 마음도

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산골 부부는 흐뭇함이었다.

오는 길에 월정분교 부근 우리가 지나다닐 때마다 

들리는 곳에 들렸다. 철마다 농사지은 농산물을 파는

집인데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 이 집에서 양파를 산다.

올해도 겨우내 먹을 저장용 양파를 샀다. 아주머니는

반갑다며 당근과 조금 흠집이 있는 감자를 주시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가지고 가서 먹어보라고 하셨다.

아내와 함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는데 띠리링~

하며 전화가 들어왔다. 예전 광고회사에서 함께하던

직장 후배였다. "형! 간만에 집에 왔더니 안계시네?"

라고 하여 "오랜만이야! 나 지금 진부에 있는데..."

"현관앞에 농사 지은 감자 한 박스 놓고가요. 형수님

하고 맛있게 드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볼 일이

또 있어 기다리란 말을 못하고 그저 고맙다고 했다.

이 후배는 인근에서 스키샵을 하다가 지난해 운두령

넘어 홍천에 터전을 잡고 농사와 광고일을 하고 있다.

이따금씩 전화를 하거나 만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만나지 못하고 감자만 받아서 고맙고 많이 미안하다.

 

집으로 오면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별 것은 아니지만 정성껏 기른 끝물 고추로 나눔을

했더니만 이렇게 당근과 감자를 덤으로 받기도 하고

당신 후배에게 좋은 감자 선물을 받게 되네. 그러게

나누면서, 베풀면서 살다보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것

아닌가 싶어! 그렇잖수?"라며 웃는 아내 모습이 너무

좋아보였다. "맞네, 맞아! 우리 지금처럼 살아가세!"

라고 맞장구를 치며 흐뭇하여 함께 웃었다.IMG_20201014_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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